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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스스로 행복하라(5)

루미1984 2024. 4. 2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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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 여기 바로 이 자리

 

 

오랜만입니다.

말보다는 침묵이 더욱 귀하게 여겨질 때 입 다물고 침잠하고 싶어집니다. 말이 의사 표시의 하나이듯이 침묵도 또한 의사 표시의 한 방법입니다. 말과 침묵의 상관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삶의 내밀한 오솔길이기도 합니다.

15세기 인도의 영적인 시인 카비르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벗이여, 어디 가서 '나'를 찾는가

나는 그대 곁에 있다

내 어깨가 그대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절이나 교회에서 나를 찾으려 하지 말라

그런 곳에 나는 없다

인도의 성스러운 불탑들 속에도

회교의 찬란한 사원에도

나는 없다

어떠한 종교 의식 속에서도

나를 찾아낼 수 없으리라

다리를 꼬고 앉아 요가 수행을 할지라도

채식주의를 엄격히 지킨다 할지라도

그대는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그대가 진정으로 나를 찾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벗이여, 나에게 말해 다오

무엇이 신인가를

신은 숨 속의 숨이니라

 

 

우리가 믿는 종교나 신앙이 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당이나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법당이나 교회에 있나요? 법당이나 교회에 있는 것은 불상이건 십자가이건 그것은 한낱 형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법당이 절에만 있나요? 부처님이 계시고 법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법당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이나 교회를 찾아가는 것은 그런 곳에서 그 길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교회와 절은 다분히 상업주의에 오염되어 본래의 기능을 잃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부처님? 신? 하느님? 이것은 또 얼마나 관념적이고 개념화된 이름입니까. 이런 메마른 관념과 개념에 얽매여, 살아 있는 참 부처님과 신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관념화되고 개념화된 '머리의 종교'는 공허한 이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이 약동하는 '가슴의 종교'만이 우리들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처님과 신은 어디에 존재하나요? 마음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 밖에 있는 것은 모두가 허상입니다.

분명히 새겨 두십시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인과 관계를 비롯한 우주 질서와 존재의 실상을 철저히 인식하고 본래의 자아에 눈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면밀히 지켜보십시오. 자신의 생각과 말씨, 혹은 걸음걸이와 먹는 태도, 운전 습관, 그리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그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는 이 과정에서 순간순간 삶의 실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안으로 살피고 지켜보는 일이 없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거친 황무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는 그럴듯한 말이나 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마음 쓰는 일과 일상적인 행동 안에 있습니다. 만나는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여는 일이 곧 자비입니다. 이와 같은 자비의 실현을 통해서 지혜도 자라나는 것이지, 무엇인가를 깨닫는 그것만으로 지혜가 갑자기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완성'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이상이지 현실은 아닙니다. 중생계가 남아 있는 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 불교의 폐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깨달음에 얽매여 깨달음의 행을 잃고 하루하루 세월만 헛되이 보내고 있습니다. 깨닫지 않고는 자비를 실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말에 제정신 지닌 사람은 속지 마십시오.

본래의 깨달음〔본래성불 本來成佛〕은 어디에 두고 새삼스럽게 깨닫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수도하고 정진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닦지 않으면 오염되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제일가는 정진〔수본진심 제일정진守本眞心 第一精進〕이라고 옛사람들도 말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닦는 일과,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닦는 입장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깨달음에 얽매여 본래의 깨달음을 망각하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흥미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내가 하는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무엇이 되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좋아서 하는 일은 그대로 충만된 삶입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라면 그건 흥미가 아니고 야심입니다. 야심에는 기쁨이 없고 고통이 따릅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우주의 커다란 생명력의 작용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개체인 내 자신이 어떤 일을 통해서 전체인 우주로 합일되어야 합니다. 둘이 아닌 법〔불이법 不二法〕이란 이를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되면 어깨를 활짝 펴고 삶의 한복판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는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 주지 않습니다. 올바른 종교는 두려움을 없애 주고 삶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합니다. 다시 카비르의 시를 소개합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목말라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는 그대 집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숲으로 저 골짝으로 쉴 새 없이 헤매고 있다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 보라

이 도시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자신의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1992)

 

 

 

<Lumi1984>

스스로 행복하라 <숲속의 이야기 中>

 

그 전날 일을 고되게 하고 나면 어쩌다 깊은 잠에 빠져 예불 시간이 늦어질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잠결에 누가 '스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벌떡 깨어난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분명히 들리는 소리. 그것은 아마 누구에게나 따르고 있는 '수호천사'의 소리일 것이다.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자아의 분신 같은 존재. 그러나 삶에 질서가 없거나 무디어지면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정신이 맑고 마음이 투명해야 자기 분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오늘 새벽 문 밖에서 들리는 까미의 발자국 소리, 문 앞을 맴도는 소리가 들려 일어나서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문득 어제 읽었던 구절 '수호천사'가 다녀간 것인가하고 웃음이 났다.

어제 아침은 조금 늦었기에 오늘은 조금 일찍 서두드라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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