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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2)도서 2024. 4. 6. 21:02728x90반응형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사는 법 ♣ 공덕천과 흑암녀
도봉산 망월사 천중 선원에서 아침 공양을 한 뒤 저와 두 도반스님, 이렇게 셋이 모여 커피 한 잔씩 마셨습니다. 가끔은 선원장 스님이 이 자리에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도반스님이 다음 송광사 안거 때 한 자리가 비어 방부(房付, 머물며 수행할 수 있기를 청하는 일)를 넣었는데 허락을 받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방부의 채택 여부를 결정하는 송광사 어른스님께 "망월사에서 제일 착한 스님이 방부를 넣는다"는 소문이 들어간 모양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곤 선원장 스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OO스님은 착해서 송광사 방부를 넣을 수 있었지만, 원제 스님은 못 들어가겠네."
선원장 스님의 애정 어린 말씀에 저는 재빠르게 말대꾸했습니다.
"스님, 아닙니다! 저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해서?"
"원래 공덕천과 흑암녀는 같이 다니잖습니까. OO스님이 공덕천 과니까 흑암녀 택인 저도 당연히 같이 따라갈 수 있는 거죠!"
스님들이 방 안에서 한바탕 웃어버렸습니다.
《열반경》〈성행품〉에는 '공덕천과 흑암녀' 설화가 나옵니다.
옛날 옛적, 궁궐 같은 부잣집에 하늘에서 금방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온몸에 진주와 보석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찾아왔다. 미모와 향기에 황홀해진 주인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다.
"나는 공덕천입니다."
주인이 다시 물었다.
"우리 집에는 왜 왔소?"
공덕천이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의 복이란 복, 행운이란 행운, 횡재할 수 있는 재수란 재수들을 모두 모아 당신네 집에 찾아들게 하려고 찾아온 천사랍니다"라고 했다.
주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여인을 집 안으로 들게 하고는, 온갖 진수성찬을 대접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주인은 또 어떤 선녀가 더 큰 복을 주려고 찾아온 것일까, 기대하며 달려 나갔다. 대문을 열자 때가 꼬질꼬질 더러운 넝마를 걸치고, 얼굴은 새까만 밉상인 데다 주근깨가 잔뜩 낀 여자가 서 있었다. 주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당장 여자를 내쫓을 심산으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다.
여자가 대답하길, "나는 흑암녀입니다"라고 했다.
"대관절 우리 집에 찾아온 용건은 무엇이요?"
"나는 당신네 집으로 수많은 불행과 불화, 재앙, 질병과 재산을 탕진하게 하는 나쁜 운수가 찾아들게 해주러 온 여신이요."
이 말을 듣고 주인은 벌컥 화를 내면서 부엌칼을 들고 와서는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한시 바삐 사라지라고 했다. 그러자 흑암녀는 까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습니다. 다만 지금 당신 집 안에 있는 공덕천이라는 여자가 나와 쌍둥이 자매인데 어찌하면 좋은가요? 우리 자매는 몸엔 보이지 않는 끈이 달려있답니다. 우리 둘은 어딜 가든지 함께 다닐 수밖에 없지요. 떨어져서는 절대 못 사는 운명이라서 내가 이 집에서 쫓겨난다면 응당 언니도 나를 따라올 것이고, 언니가 집에 있는 한 나도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주인은 공덕천을 바라보니, 공덕천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덕천과 흑암녀' 설화를 두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긴다, 인생은 새옹지마다, 보기에 따라 좋은 일일 수도 혹은 나쁜 일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풀이합니다. 옳은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설화에는 전혀 다른 상징이 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실제 사람 사는 건물 형태의 집이 아닙니다. 그 집은 바로 '아상我相의 집'입니다. 내가 있다는 상相으로 들어와서 그 집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공덕천과 흑암녀입니다. 그렇기에 공덕천과 흑암녀는 '분별심'을 뜻합니다.
공덕천이 선善이면 흑암녀는 악惡이고, 공덕천이 옳은(是) 것이면 흑암녀는 그른(非) 것이고, 공덕천이 아름다움(美)이면 흑암녀는 추醜함이고, 공덕천이 복福이면 흑암녀는 화禍입니다. 선악과 시비, 미추, 복화는 인간이 가지는 분별심의 대표적인 것들이고, 이것이 아상이라는 집 안에서 살아가고 동시에 아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이 설화는 선악을 포함한 그 모든 분별심은 아상이라는 틀 안에서 존재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에서 살되 공덕천과 흑암녀를 들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물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아상이라는 틀을 남겨두는 이상 공덕천과 흑암녀가 수많은 형태로 변모하여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집을 헐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리하면 더 이상 자신들의 몸을 기댈 장소가 없기에 공덕천도 흑암녀도 이곳을 그냥 지나치게 될 것입니다. 집이 없으니 잠시 머물 수조차도 없으므로, 그것이 공덕천인지 흑암녀인지 알 도리도 없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으로만 느껴질 것입니다. 흘러가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무슨 선악이 있고 시비가 있을 리가요.
집이 없기에 그 어떤 주인이 있을 리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그냥 온갖 초목이 자라나는 숲만 있을 뿐입니다. 그 숲 안에서 나뭇잎은 바람에 일렁이고 있으며, 시냇물은 졸졸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끼 낀 바위가 조용히 시냇물 소리를 듣고 있으며, 보름달은 호젓하게 떠서 숲을 비출 뿐입니다.
이 두루 하고 온전한 소식이 눈앞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나'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통로는 본래 비워져 있습니다 - 네이버 한자사전
- 1.사상(四相)의 하나. 오온(五蘊)이 화합(和合)하여 생긴 몸과 마음에 참다운 ‘나’가 있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執着))를 이른다.
- 2.자기(自己)의 처지(處地)를 자랑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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